본문 바로가기

프롤로그⠀

무더운, 한여름 밤─.

훤칠하게 키 큰 남자가 건물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발소리를 죽이면서 한 단, 한 단, 천천히.

 

이마에는 슬그머니 땀이 배고, 얇은 입술은 무언가를 결의한 듯 굳게 닫혔다.

계단을 일곱 단쯤 올랐을 때,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손때 묻은 검은 힙색을 열고 안에서 접이식 군용 칼을 꺼냈다.

 

투박하고 검은 칼자루.

그 안에서 두툼한 칼날을 끄집어냈다.

아직 지문 하나 묻지 않은 칼날이 계단 조명을 둔하게 반사했다.

 

남자는 후우… 하며 짧은 숨을 뱉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목으로 닦은 다음 칼을 오른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2층 오른편에 침실 문이 있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황동제 문손잡이를 천천히 신중하게 비틀었다.

 

찰칵….

희미한 소리가 나며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남자의 예상과 달리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남자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슬슬 밀었다.

 

살짝 열린 좁은 틈에서 냉방이 잘된 공기가 흘러나왔다. 문틈에 얼굴을 대고 오른쪽 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덟 평쯤 되는 깔끔한 서양식 방이었다.

침실 형광등은 꺼졌지만, 방 전체가 희미하게 노란빛에 물든 듯 보였다. 침대 아래에 발밑등이 켜져 있었다.

 

에어컨이 내는 어렴풋한 기계음.

벽시계는 째깍, 째깍, 째깍…, 하며 짧은 한여름 밤을 1초씩 깎아 나갔다.

 

방 왼쪽 구석에 싱글 침대가 있었다.

 

거기서 한 여자가 자고 있었다.

 

남자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밀어 넣고 침침한 어둠 속에서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숨을 죽인 채,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윤기 도는 긴 흑발.

눈을 감고 있어도 미모가 드러나는 얼굴.

늘씬한 몸을 덮은 얇은 이불이 숨소리에 맞춰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이, 여자가….

남자의 눈 속에 슬픔인지 고통인지 모를 빛이 떠올랐다.

손에 쥔 칼자루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이 여자가!

남자는 침대에 달려들었다.

여자를 누르듯 배 위에 올라탔다.

 

여자는 눈을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사적으로 이불 속에서 남자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한 순간 여자의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몇 초 동안 남자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에어컨과 벽시계 소리만 방 안의 공기를 희미하게 흔들었다.

 

이윽고 남자는 오른손에 쥔 칼을 천천히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 자세 그대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냈다.

 

칼을 치켜든 남자의 눈에는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지만, 대조적으로 여자의 눈에는 안도감과도 닮은 차분함이 있었다.

 

나는, 너를, 죽일 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메마른 신음처럼 들렸다. 칼을 쥔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여자는 저항하지 않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듯 보였다.

 

남자가 다시 한번 죽일 거야─라고 말하려 할 때, 여자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괜찮아. 죽여도.”

 

“….”

 

“죽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고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온도를 설정해둔 에어컨이 윙 소리를 내며 멈췄다.

방 안의 정적이 순식간에 깊고 무거워졌다.

 

째깍, 째깍, 째깍…,

벽시계 초침이 남자를 재촉했다.

 

“그럼 죽어….”

이번에는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의 머리 위에서 예리한 칼날이 내려왔다.

 

푸우욱, 하며 경험해본 적 없는 불쾌한 촉감이 칼을 쥔 남자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베란다로 이어지는 미닫이문 밖.

 

무더운 한여름 밤의 어둠 속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